절망을 전염시키는 사람인가, 소망을 전달하는 사람인가
숨을 크게 한 번 쉬어 보세요. 숨을 쉬어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공기는 우리의 육신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는 것은 소망입니다. 에밀 부르너라는 신학자는 '사람의 폐에 공기가 필요하듯이 인간에게는 소망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이 주셨기에 영원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 최고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집니다. 십자가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 대신 죄악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죄악의 결과인 죽음의 형벌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죄악을 취하시고, 부활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은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합니다. 이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15절). '산 소망'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거룩하게 만들어 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소망의 전달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전도는 '당신, 내가 가진 소망을 들어보실래요?'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소망' 위에 서 있는 자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세상의 행습을 따르지 않고, '산 소망'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산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살아가게 하는지를 보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살다 보면 희망이 생기겠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산 소망'은 생각의 방식과 순서부터 바꿉니다.
우리는 오늘 셀 수 없이 많은 들숨과 날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일 앞에서도 절망의 한숨을 쉬기보다 소망의 큰 숨을 쉬며 '산 소망'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의 한숨으로 절망을 전염시켜서는 안 되고, 소망의 고백으로 소망을 전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살면서 '산 소망'을 전한는 소망의 전달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먼저, '산 소망'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위의 내용 참조). '산 소망'을 입으로 거듭거듭 말해보십시오. 낙담되는 일이 생길 때 '산 소망'을 기억하여 고백해 보십시오. 기도하면서, 이것을 반복해서 해 보십시오. 그래서 소망의 전달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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