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으니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고 하는 책을 쓴 루마니아의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루마니아가 자유화되기 전 공산치하에서 수십 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는 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말씀을 붙들고서 그 어려운 옥중생활을 이겨 냈다고 합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의 횟수를 세워보니 꼭 365회 나오더랍니다. 이처럼 성경에 365번 '두려워 말라'고 한 것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하시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범브란트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동일하게 우리에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일 것입니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염려가 밀려올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우신다!!'라고 외치십시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그분에게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을 따라갑니다.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창세기 15장의 배경 이야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십니다. 한 명의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하늘의 무수한 별만큼이나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 말씀하시고(5절), 한 평의 토지도 소유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7절, 참조. 창 23:14-20). 아브라함은 수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말합니다(6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수 많은 자손과 함께)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암소,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숫양, 산 비둘기, 집 비둘기 새끼 한 마리씩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9절). 아브라함은 이 모든 가축들을 가져와 몸통을 반으로 쪼갠 후 양쪽으로 서로 마주보게 차려 놓았습니다(10절).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 당시 행해졌던 언약식(covenant ceremony)이라는 풍습과 연결됩니다. 언약(covenant)은 약속(promise)보다 매우 강한 약정입니다. 언약식에는 몇 종류가 있었지만,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언약은 강한 부족과 약한 부족이 맺는 ‘주인과 종(主從) 언약'입니다.
강한 부족과 약한 부족 사이에 일종의 보호조약을 맺는 경우에 이런 의식을 행했다고 합니다. 서로간에 약정을 하고 나서 마지막에 쪼갠 고기 사이로 약자가 먼저 지나가고, 다음에 강자가 지나간다고 합니다.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은 그 약정을 지키지 않을 경우, ‘나는 이 쪼개진 고기와 같이 돼도 좋다.’는 강한 의사 표시인 것입니다. 달리 말해, 약정을 지키지 못할 경우, ‘나는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약속이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런 일반적인 언약식의 내용과는 다르고 놀라운 것이 17절에 나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데,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로 나타나셔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얼마나 견고한 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그 당시 풍습을 따라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이길래, 무슨 공로를 세웠길래 하나님께서 이런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죽음을 ‘새 언약’(new covenant)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26-29). 십자가에서 새 언약을 맺으시면서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는 데, 목숨을 걸고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시고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은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봅니다. “내가 누구이길래, 무슨 공로를 세웠길래 예수님께서 이런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셨을까?” 아무 것도 떠 오르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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